쏘와

XXX!

실제와 다른 부분, 오류가 많습니다.
글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행사, 대회,
그 외 등등의 모든 고유명사는 허구입니다.트리거 워닝: 학교폭력 (직접적인 묘사 X)

의주는 누군가를 찾는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사람. 그 사람이 어디 있을지는 뻔하다. 확신을 가지고 낡은 나무 문을 열면 당연히도 그가 있다. 체육복을 입고 활을 닦고 있는 선배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형, 얼른 가요. 10분 남았어요.선배는 고개를 돌려 의주에게 가깝게 다가와서 늘상 하던 그 장난을 한다. 큐피드 화살이다! 의주는 맞는 체하고 으윽, 소리를 내다 웃는다. 저 반한 것 같은데 책임져요. 안 돼, 난 안 찔렸어. 그럼 내가 맞춰야지. 으악 안 돼! 의주만 나 좋아해야 돼! 선배는 활과 화살통을 챙겨 체육관 쪽으로 달린다. 의주도 그 뒤를 쫓다가 뒤에서 선배를 안아버린다. 익숙한 복도에 해가 환히 들어 날리는 먼지마저도 눈에 보인다.그렇지만 감았던 눈을 뜨면 낡은 학교 건물이 아닌, 다른 나라의 낯선 침대 위다.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여름의 긴 해가 이제야 넘어가고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에 저녁놀이 들어서 날리는 먼지마저도 눈에 들어오는 건 여기서도 똑같다. 다시 잠들면 그 꿈을 이어서 꿀 수 있을까. 의주는 날아다니는 먼지를 보며 헛된 후회를 했다. 여기까지 와놓고도. 그렇게 원하던 걸 손에 쥐고서도. 그건 아마 이게 내 꿈이 아니라, 남의 꿈이라서일 수도.

하노이 아시안게임 5일째인 오늘, SBC 뉴스 시작하겠습니다. 대한민국 태극 궁사들이 금빛 화살을 쏘며 한국 양궁이 또 아시아 정상에 올랐습니다. 양궁 대표팀은 어제 남자 리커브 종목 단체 금메달에 이어 오늘은 남자 리커브 금메달과 은메달, 여자 금메달과 동메달로 메달을 네 개나 석권하며 한국 양궁의 저력을 보여줬는데요. 이로써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 6회 연속으로 리커브 종목에서 여자 개인 금메달을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김주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경기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잠깐 잠이 들었던 의주는 저녁 먹게 일어나라는 소리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누가 틀어둔 아홉시 뉴스 때문에 빵빠레 불며 등장한 셈이 됐다. 오늘 저녁뉴스의 처음을 장식한 양궁 남자 대표팀 셋이 선수촌 식당에 앉아있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축하 인사 한마디씩을 건넸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꼭 입에 올리는 이름은 개인전에서 메달은 구경도 못한 변의주. 특히 남자 선배들은 언제 봤다고 “어이, 변 병장 제대 축하해?”, “넌 진짜 정훈이랑 원석이 앞으로 업고 다녀라” 같은 소리를 했다. 다른 선배들은 진작 메달을 따냈으나, 올봄에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아 국제 대회 출전이 처음인 의주는 이번 대회 금메달 유무에 따라 예술체육요원 근무 여부가 판가름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 한참 젊은 의주는 한시가 급한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원래 올림픽보다 어려운 게 대표팀 선발전이랬다. 올해 대표팀을 한다고 다음에 또 기회가 주어지진 않으니까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다행히 개인전 전날에는 단체 결승이 있었고, 꽤 접전 끝에 일본을 상대로 금메달을 따냈다. 국제대회만 열리면 양궁에 국민들이 거는 기대가 있고 결승이 한일전이어서 꽤나 화제가 되는 바람에 의주는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를 받느라 바빴다. 대신 그다음 날 서른 넘은 선배들이 개인전에서 금, 은 나란히 나눠 달 때 의주는 준준결승에서 고배를 마셨다. 정훈은 이새끼 금 땄다고 빠져서 개인전 설렁설렁했냐 농담했지만 의주도 그건 농담인 걸 알았다. 그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괜히 다들 버스 태워준 베테랑 선배들에게 고마워하라는 말을 한마디씩 얹을 때는 부러 대꾸 안 하고 웃기만 했다. 결승의 결정적 순간, 선배들이 8점 9점 쏘는 와중에 의주 혼자 엑스텐 쏜 건 얘기도 안 했다.원석 선배는 하노이행을 준비하던 때 의주에게 그렇게 말했다. 2년에 한 번씩만 양궁 보는 사람들은 텐텐텐이 당연한 줄 알아. 어쩌다 8점 쏘면 실망하고 7점 쏘면 역적 돼. 활 주면 땡기지도 못할 사람들이. 그러니까 국제대회 나가면, 결과가 어떻든, 댓글 읽지 마.그래서 의주 댓글은 읽지 않았으나 다른 선수들이 제 눈앞까지 와 선배들과 제 차이를 굳이 짚어내면 별말 하지 않았다. 대신 인사나 마저 하고 밥이나 퍼먹었다. 깨작깨작하는 것 같아도 의주가 원래 그렇게 먹는 걸 아는 선배들은 개의치 않아 했다. 상비군, 후보에만 있다가 첫 아시안 게임 출전권을 3위로 얻기까지 의주 나름의 지난한 여정이 있었지만, 아직 실력이 모자라고 경험도 적기에 개인에서 메달을 못 딴 것은 억울할 것도 없는 결과였다. 게다가 진천에서 한창 훈련하던 중, “너 기수 해야 돼” 라는 말을 듣고 (게다가 같이 기수를 한 선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잘만하면 지폐에도 얼굴을 새길 수 있을 것 같은 유명인이어서 의주는 처음 만나 악수를 할 때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리허설에 몇 번이나 불려 간 바람에 더 정신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까먹은 시간이 있으면 자는 시간, 쉬는 시간을 조금씩 더 줄여서라도 훈련을 더 하고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절 자꾸 부르시는 바람에 제가 개인전에서 메달을 못 땄습니다 하고 핑계 대기엔 민망한 거였다.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모두가 그 일주일 정도는 감히 탓할 수도 없는 연습량을 소화하는 걸 알았고, 웬만해선 의주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훈련해 온 걸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의주는 정말 빨리 태극 마크를 단 쪽인지라 대놓고 듣기 싫은 말하는 사람에게도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잘하겠습니다. 하고 입꼬리 올려 웃어 보였다.뭐를 증명해야 하지? 무엇을 더? 이것엔 답이 없었다.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도 그건 단체전이니까. 개인전에서는 메달이 없었으니까. 그건 아시안 게임이니까. 세계 선수권이나 올림픽도 아니고. 공부를 했을 때도, 운동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한 뒤에도, 의주는 늘 성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성적으로 증명이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많이 훈련하는지로 증명해야 했다. 특히 양궁이라는 종목을 시작하고 나서는 더 했다. 훈련량과 컨디션에 따라 바로 파도치는 점수. 매년 무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국가대표 선발전. 끊임없는 증명의 연속에서 의주는 도망치는 대신 꿋꿋이 버텨내기를 선택했다. 도망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두 번이 넘으면 습관이 될 것 같았다. 그것이 의주가 손에 물집이 여러 번 잡히고, 터지고, 굳은살을 박아가면서도 활시위를 놓지 않은 이유였다. 자기가 쉽게 도망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질문을 바꿔서, 누구에게 증명해야 하나? 이 질문에도 역시 의주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자기가 선수여도 종목에 대한 이해는 없을 다른 동료들의 평가나, 생각할수록 점수 깎이는 자기 평가는 제쳐두고. 코치나 감독이 의주에 대해 평가한다면 미련할 정도로 성실한 선수라고 할 테다. 그렇지만 그게 부정적인 뜻은 아니다. 성실은 모든 스포츠에 필요한 덕목이지만 특히 양궁에서 빛을 발하는 재능이다. 그리고, 의주는 미련하긴 해도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해서 잘 아는 선수라 부상에는 예민했다. 그리고 딱 그 직전에 가기 전까지 최선을 다했다. 양궁이라는 건 사실 센스나 타고난 재능으로 승부 보는 종목이 아니다. 몇천 몇만 번의 반복을 통해서 기본기를 쌓고 감을 몸에 새겨넣는 종목이기 때문에, 탁월하게 성실하고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안다는 것 자체가 의주의 가장 큰 장점이고, 센스고, 타고난 재능이었다. 강풍기 옆에서도, 한창 시즌 중이라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야구장에서도, 바람이 부는 해변에서도 훈련을 했던 의주는 정신을 한데 집중해 외부의 소음과 자극을 차단한 뒤, 다만 바람의 흐름을 읽고 그 바람에 맞는 화살을 쏘면 됐다. 정밀한 계산을 통해 배우고 수만 번의 반복을 통해 연습하느라 아로새겨진 근육을 따라 활시위를 놓으면 화살은 매번 의주가 생각했던 그곳에 가 있었다. 그게 의주의 특기였고, 양궁에 상대적으로 늦게 입문한 의주를 국가대표까지 올려놓고 금메달까지 따올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통상적으로는 본인 종목이 끝나면 빠르게 입국하지만, 양궁 대표팀은 며칠 더 있다가 간다는 소식을 대회 시작 전부터 들었다. 한국 대사가 굳이 불러서 양궁 대표팀만 만찬을 한다고도 했고, 스폰서사가 투자와 ODA 때문에 보여주기식으로 현지 양궁 꿈나무들과의 만남 이런 행사를 연다고 하고… 이번이 첫 국제대회이니만큼 얼굴 덜 팔리고 유명세 없는 의주는 조금 더 먼저 귀국해도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메인 스폰서가 선한 이미지에 잘생기고, 훤칠하고, 젊고, 이제 국제무대에 데뷔하는 루키를 꼭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의주에게 절대 빠지지 말라고 했다. 덕분에 중간중간 일정이 널널히 비는 날들이 있어 잠이나 많이 자야지 싶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실컷 누워있던 의주를 끄집어내온 것은 동갑에 같은 양궁 국대지만 종목은 달라서 적당히 편하게 친할 수 있던 진선이었다.나 초등학교 때 알던 애가 이번에 경기 나온다고 해서 인사 가려고. 너도 갈래?의주는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진선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진선을 따라 앉고 보니 준비하고 있는 코치진 중 한국 유니폼이 안 보인다. 대신 대만과 일본 이름을 단 사람들이 바쁘게 준비한다."너 학교 외국에서 나왔어?”진선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저 대만 선수가 나랑 같은 동네 살았어.”아파트에 있는 배드민턴 클럽 초등부 교실에 나갔었는데 니콜라스도 그 아파트 살았거든. 그제야 의주는 고개를 들어 전광판에 적힌 이름을 본다. WANG Yi-Xiang. 니콜라스가 아닌데? 어 저건 우리나라로 치면 호적상 이름 같은 거. 어쨌든 의주는 처음 듣는 이름이니 구글에 그대로 쳐본다.

이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구나.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선이 날카로운 얼굴인데 모델같이 생겼다. 조금만 내리면 나오는 기사의 수식어도 화려하다. 대만의 배드민턴 아이돌. 포브스 30 Under 30 선정. 202X 7월호 대만 보그 커버스토리. 그중에서도 의주가 클릭한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반도체 연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시절 서울에 거주. 국제학교 다녀 영어도 한국어도 유창.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던 이웃이자 애틀랜타 올림픽 배드민턴 은메달리스트 선경희 선수와의 연으로 배드민턴 시작, 선 선수를 사사하고 이후 대만에 귀국하고도 훈련을 이어가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엘리트 중의 엘리트구나. 의주는 딱히 엘리트 교육 받은 체육 선수들을 좋아하진 않았다. 본인도 그런 엘리트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랬다. 오히려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는 설명이 정확하겠지만. 사람들은 으레 어릴 때부터 엘리트 체육 교육만 받아온 애들에게 생기는 편견이 있고 의주는 그에 부정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본인에게도 그런 편견이 없다면 솔직히 거짓말이었다.그래, 솔직히 말해서 의주는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올림픽 기간에조차, 심지어 본인이 그 대상이 된 지금도, 이렇게까지 온 국민이 난리법석을 칠 일인가 생각하기도 한다. 의주는 남자애들이라면 다 좋아한다는 축구를 보고도 그렇게 감명받아 소리 지른 적이 없다. 야구장은 훈련 때문에도 가끔 가고 그러다가 경기도 몇 번 봤다. 그나마도 요즘은 훈련이 바빠 자주 보지 않았다. 끊임없이 서열을 매기는 시스템도, 그 시스템에 따라 서열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그에 따라 만들어지는 위계질서도, 소리도, 윽박도, 폭력도 모두 싫었으니까. 가끔 경기를 보면 그 뒤에서 만들어질 그런 것들을 상상하지 않기 어려워진다.왕이샹, 니콜라스는 한눈에 보기에도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의주는 워낙 순하게 생겨 어디 가서 선수를 한다고 하면 다들 의외라고는 하긴 하는데… 어차피 양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저렇게 일 대 일로 무언가를 하다 보면 인상도 달라지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근데 나 배드민턴 제대로 본 적 한 번도 없어.”
“보면 바로 알아. 걱정 마.”
“뭐… 그러겠지?”
“그리고, 니콜라스가 진짜 잘해.”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는 중에 심판이 선수들과 입장해 동전을 뒤집는다. 재밌으면 좋겠다. 옆에서 진선이 재밌을걸? 하는 말과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모든 종목엔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어떤 지루해보이는 종목조차 그러하다. 예컨대 양궁의 아름다움은 인내와 확신에서 온다. 활시위를 놓지 않고 정신을 집중한 뒤, 마음과 몸을 차분히 한다. 몸통부터 어깨, 팔, 손끝까지 감각의 밸런스를 맞추고 한 데 수렴한 에너지를 발사한다. 그 후 살이 눈 깜빡할 새 원하는 곳에 가서 꽂혀 있는 쾌감은 의주가 활을 손에서 놓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였다.그리고 그날, 의주는 처음으로 배드민턴의 아름다움을 알았다.왕이샹은 마르지만 근육이 꽉 찬 몸으로 경기 시간 내내 뛰고 구르고 다녔다. 저 멀리서 클리어가 날라와도 공의 궤적을 읽고 훨씬 먼저 예상 도착 지점에 달려 나가 공을 맞받아친다. 뛰어도 역부족이라면 몸을 날려 엎드려서라도 공을 받아낸다. 그렇게 구르고 넘어져도 재빠르게 다시 일어나서 상대가 절대 이길 수 없는 곳에 스매시를 꽂아 넣는다.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흐르는 땀이 앞머리를 다 젖혔다. 왕이샹은 그래도 그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시 일어난다.의주는 그걸 보면서 문득 배드민턴에는 펜싱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의주가 한때 꿈꿨을 정도로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그 아름다움이, 그에게서 분명히 보였다.

경기는 빠르고 싱겁게 끝났다. 역시 대만의 왕이샹이 3세트를 가볍게 선취했다. 인사를 가자는 진선의 말에 경기장으로 내려갔더니 자기 상체만 한 가방을 이고 코치와 대화하는 그가 있었다. 큰 점수 차로 가볍게 끝난 경기였어도 계속 코트에서 뛰어다녀서 그런지 하얀 유니폼이 땀에 젖어 상체에 달라붙어 있다. 의주는 두 발짝 뒤로 떨어져 있었다. 진선과 의주가 온 걸 알아챈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인사하고, 코치진에게 한두 마디를 더 하더니 다가왔다.“니콜라스!”
“진선. 오랜만이야.”
“한 사 년 만인가?”
“우리 서울에서 보고 안봤으니까, 그럴걸?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진짜 잘됐다. 국가대표 된 거 축하해 진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 축하를 다 받네. 내가 영광이다.”
“야아.”과연 뉴스에서 본 대로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했다.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의주는 그가 의주 쪽에 시선을 던지고야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한국 양궁 국가대표 변의주입니다. 경기 잘 봤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진선이랑 한국 친구들은 저 니콜라스라고 불러요.”
“우리 다 동갑이야.”
“경기에서 너무 멋지시던데요.”
“하하하, 저는 양궁 하는 선수들이 더 대단한데. 저는 가만히 있지 못해서.”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의주는 유산소와 근력 루틴을 하고 나면 뻗어있곤 했는데, 니콜라스는 경기를 뛰고 얼굴에 홍조가 빨갛게 올라왔어도 피곤하지 않은지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있었다.“근데 의주? 봤어요.”
“저를요? 어디서요?”의주는 제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자료화면이 지난 이틀간 공중파 아홉 시 뉴스 제일 첫 꼭지를 장식했어도 아직은 누가 저를 알아보는 데에 익숙지 않았다.“그 opening ceremony에서 깃발 드는 거 했죠? 저 봤어요.”
“그걸 어떻게 봐요?”
“그 ceremony에서 viral 된 tiktok. 거기에 나오잖아요.”
“아…”개막식에서 한국이 입장할 때, 선수단 중 한 명이 흘러나오는 주제가에 맞춰 춤을 추며 입장 하던 중 거하게 트워킹을 했다. 그게 그대로 방송에 송출되고 관객석에서 잔뜩 줌을 땡겨 찍은 동영상이 [아시안게임 한국 국대 MZ력 레전드]로 퍼지며 릴스와 쇼츠 알고리즘을 타고 퍼졌다. 의주는 기수라 맨 앞에 서있었고, 기수를 찍은 바스트 샷도 방송에 나왔다보니 자연스레 의주도 그 영상에 등장했다. 선수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알려지다니… 의주는 머쓱하게 웃으며 알아봐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짧은 인사치레가 끝나고, 진선과 니콜라스는 오랜만에 만나 신나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너 아직도 거기 살아? 우리 부모님만. 근데 저번에 갔을 때 선생님 뵀어. 진짜? 나도 올해 코리아오픈 갔을 때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여행 가셨어. 그 둘만 아는 얘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선이 의주의 존재를 기억해내고 병풍처럼 세워둔 것에 머쓱해하며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다.“피곤할 텐데 너무 붙잡아놨다. 얼른 들어가. 세미파이널도 잘하고. 잘하겠지, 니콜라스잖아.”
“고마워.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그건 맞지. 그래도.”
“진선도 한국 잘 들어가.”디엠해, 라고 인사하는 둘 사이에서 의주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니콜라스는 의주에게도 다음에 또 봐요! 하고 인사했다. 또 볼 일이 있을까? 다음 올림픽?… 그런 생각을 말로 뱉진 않았지만. 니콜라스가 저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몸을 돌린 진선이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이상한 말을 했다.“어릴 때 쟤 좀 좋아했는데.”
“어?”원래 어릴 땐 그러잖아. 배드민턴도 잘하고, 국제학교 다녀서 영어도 하고, 잘생기고, 그러니까 멋있었지. 의주는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멋있긴 하더라.“그럼 사귀었어?”
“겠냐? 그랬으면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만났겠어?”진선이 의주를 째린다. 하긴, 진선은 이미 몇 년간 만나 부모님까지 서로 봤다던 남자친구가 따로 있었다.“근데 쟨 그때도 이상하게 여자애들이랑 놀면서 여자친구는 안 사귀더라. 계속 페북이랑 인스타 친구 했는데도 누구랑 연애한다 이런 걸 한 번 본 적이 없어. 올림픽 나가고 이렇게 알려지기 전에도.”
“뭐… 훈련하느라 바쁘면 그럴 수 있지.”
“진천동물원을 보고서도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구나.” 진선이 소리 내 웃으며 대꾸했다.
“넌 그런 말 쪼옴.”그날, 의주는 돌아온 숙소에서 대충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미처 닫지 않았던 탭을 내리며 니콜라스를 더 찾아봤다. 기사를 지나면 커뮤니티에서 쓴 그의 글과 한국 목격담이 뜬다. 유명하구나. <한국 진짜 좋아하는 왕이샹> 글을 클릭해 들어가자 한국의 배드민턴 선수가 몇 년 전에 했던 유명한 세레모니를 오마주한 니콜라스의 GIF가 뜬다. 그 아래에는 한강에서 밤산책하며 찍었다는 사진이 있다.자연스럽게 사진의 출처들인 인스타그램으로 넘어가니, 아이디 옆에 파란 인증마크는 있지만 이름도 바이오도 없다. 피드에 사진은 많다. 무슨 모델처럼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하며 더 내려보니 진짜 잡지 모델을 한 사진도 있다. 맞다, 보그 커버 했다고 했지. 의주는 피드에 있는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잘 나왔다 싶으면 탭을 두 번 해서 좋아요를 눌렀다. 민소매를 입은 사진에서는 어깨와 팔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또 엄지손가락 두 번. 좀 더 내리면 한강을 배경으로 라면을 먹는 사진. 하얀 하트. 네모 안에 지난 몇 년의 일상이 빼곡하다. 망가진 셔틀콕들. 탈색을 이렇게도 했구나. 잘 어울린다. 고양이 좋아하는구나. 고양이처럼 생겼는데. 친구 엄청 많은가 보네. 한국에 자주 오는구나. 한국에서 매년 대회가 있다고 했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3년 전 사진을 보고있을 때 쯤 화면 상단에 알림이 뜬다.

[@wyxthebad: 제 피드 구경해요?]
[@wyxthebad: 😄]

깜짝이야. 아니, 팔로워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내가 보고 있는 건 어떻게 아는 거야. … 아니 이걸, 어떻게 대답하지? 뭐, 음… 의주는 일단 답장을 하러 디엠창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요청이 왜 이렇게 많아. 심지어 친구들이 태그를 했다는 알림도 한가득이다. 대회 때까진 정신 안 팔리겠다고 알림도 꺼두고 잘 들어가지도 않았더니 난리가 났다. 저를 태그해 준 친구들이며 지인들의 디엠에 좋아요 누르고, 고맙다고 다 답장을 하고 나서야 이샹에게 답장할 수 있었다. 구경하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의주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타자를 쳤다.[넵]뭐 잘못했다가 걸린 사람도 아니고. 대답이 늦어 바로 답이 올 거란 생각을 못했는데, 의주가 답을 하자마자 화면에 점 세개가 뜨다 곧 사라지고 답장이 온다.

[왜요? 😸]

핸드폰을 잡은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달리 할 말이 없다. 의주는 솔직하게 답하는 법 밖에 몰랐다.[궁금해서요]점 세 개가 오래 떠 있다. 떠 있다가 사라지고 다시 뜬다. 의주는 그 화면을 노려본다. 내가 한 말이 이상한가? 이런 거로 고민하는 편이 아닌데 갑자기 땀이 삐질 흘렀다.야,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겠다, 시력 좋다고 핸드폰 너무 가까이 보다간 큰일 난다. 이십 대 때 시력 훅가는 애들 많아.
옆에 있던 정훈이 한마디 한다.그 말이 끝나자 바로 새 메시지가 위에 써두었던 글자들을 밀고 올라온다.

[제가 왜 궁금해요?]
[😮]

갑작스러운 질문이 당황스럽다. 왜 궁금하냐니? 궁금한 데에도 이유가 있나? [아까 경기 보고 멋있어서요] 이 사람 왜 이렇게 집요한가 생각하고 있으니 곧 춤추는 고양이 GIF와 함께 덧붙이는 말이 온다. [의주는 사진이 많이 없네요] 그런가? 하고 피드에 들어가 봤다가 갑자기 늘어나 뒤에 K가 붙은 팔로워를 보고 놀랐다. 여기 뭐 아무것도 없는데.[사진 잘 안 찍어서…]니콜라스는 그 메시지에 하트를 남기고는 딱히 답이 없었다. 의주도 제가 딱히 할 말 없게 답장하는 건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싫은 건 아닌데, 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조금 민망하기도 했고, 이런 거에 워낙 서툴기도 했다. 니콜라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생각나고… 그 사람과 닮았다는 건 아니지만.의주는 의식적으로 옛날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의주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트라우마, 징크스 같은 것들도. 다른 운동선수들은 다 하나씩 갖고 있다는 작고 사소한 징크스들도 의주에게는 없었다. 양궁을 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생각을 비우고 집중하는 능력인데, 그런 거 하나하나 다 의식하다 보면 잡념이 많아지니까. 다행히도 생각을 털어내는 건 의주가 굳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가끔 옛날의 그림자가 무의식 차원에서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는지, 가끔 악몽을 꾸는 밤이 있었다. 그런 날엔 꼭 오전 훈련 때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거나 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주도 그런 줄 몰랐는데 그게 그대로 수치로 나와서 알게됐다. 그런 꿈을 꿨다는 건 의주만 아는 사실이니까 원인이 함께 데이터화되지는 않았다.그러니까 말하자면, 의주에게 영향을 주는 어떤 패턴이 아예 없진 않았다. 의주가 의식하고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하겠지만. 그 패턴에 징크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런 패턴을 좀 더 줄이고, 데이터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더 많이 연습했다. 무의식적으로 혼란한 날에도 나, 활, 화살, 그리고 과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래서 의주는 결코 어린 시절을 구태여 돌아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때의 자기를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원래 사춘기 때란 감정이 요동치기 마련이니까.그렇지만 오늘 배드민턴 경기를 보고서는, 깊숙이 묻어두었던 펜싱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배드민턴과 펜싱의 연관성을 잘 떠올리지 않겠지만, 의주에게는 다른 사람과의 한 판 진검승부라는 점도, 순발력과 결정력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렇게 결국 상대의 약점을 노려야 한다는 점도 눈에 들어왔다.한때는 의주도 펜싱을 좋아했다. 지금 의주가 국가대표 타이틀을 달고, 협회 회장과 밥을 먹고, 격려를 받고, 프로필 사진을 찍고,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파이팅 포즈로 기사 사진을 찍는 그 모든 부담스러운 과정마저 즐거운 마음으로 내켜 할 수 있을 만큼, 그 책임감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만큼 양궁을 좋아하듯이. 의주도 득점하고 나서 헬멧을 벗고 기쁨의 포효를 할 때가 있었다. 펜싱은 그래야만 하는 스포츠니까. 니콜라스에게서 그렇게 기뻐하던 어린 날의 제가 보였다. 아, 정말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걸 경기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 사람이 저 자리에 오를 때까지 가지고 온 것들이.

그 선배. Y는 의주가 운동을 그만 두었을 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치듯이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를 진학했을 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학교에서 마주했던 사람이다. 이젠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녀야겠다 마음 먹었던 의주는 특별 활동으로 도서부를 선택해서 점심 시간과 석식 시간에 도서관에 가있었다. 반납 트레이에 있는 책들을 두고 분류기호에 따라 꽂아넣는 일은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공 차고 소리 지르는 남자애들 가득한 학교에서 조용하고 냄새나지 않는 몇 안되는 장소기도 했고. 그 곳에 자주 와있었던 게 한 학년 선배였던 Y다. Y는 책을 읽을 때도 있고, 온돌을 깔아둔 한 쪽 구석에 누워있을 때도 있고, 때로는 도서부원들이 있는 카운터까지 와서 이런저런 말을 걸기도 했다. 의주한테 말을 거는 건 아니었지만 윗 학년들과는 안면이 있어보였고, 의주에게도 1학년이냐며 이름을 물어보더니 그 후에 복도에서 마주치고 먼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의주도 고등학교에 올라오며 키가 훌쩍 컸지만, Y는 그보다도 키가 컸고 생긴것도 멀끔해 어쩌다 도서관 밖에서 보면 주변에 친구들을 늘 달고있었다.같이 당직이었던 선배 하나가 축구대회를 핑계로 빠지고 의주 혼자만 남아있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Y는 들어오더니 오늘은 의주밖에 없네, 했다. 이름은 언제 외운거지. 그리고는 옆자리가 비었냐며 도서부원도 아니면서 카운터에 밀고 들어와 앉았다. 도서부원도 아니면서 이래도 돼? 라고 생각한 의주의 속마음을 읽은 듯 Y는 나는 명예 도서부원이야, 하고 웃었다.“그럼 선배는…”
“형이라고 해. 무슨 선배야.”
“그럼 형은 무슨 부인데요.”
“나? 나 양궁.”
“아…”
“우리 학교 양궁 명문인데.”
“몰랐어요.”정말 몰랐다. 도망치듯 이사 온 도시에서 새롭게 가게 된 학교였고, 친구를 엄청 많이 만들거나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의주는 운동 좋아해? 나가서 축구하는 것도 본 적 없는 것 같고.”
“음… 별로, 땀 흘리는 게 싫어요.”
“그래?”
“더위를 좀 타서… 땀이 많아요.”
“양궁은 별로 땀 안 나는데.”
“오…”
“서서 딱, 쏘기만 하니까. 간지 크.”Y가 한 쪽 눈을 감고 활시위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매끈하게 잘생긴 옆얼굴이 곧 돌아 의주를 마주 본다.“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을 때도, 원하는 곳에 화살이 꽂히면.”
“…”
“그건 진짜 짜릿하거든.”웃으며 진짜 재밌어, 하고 말하는 눈. 의주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눈이 얼마나 빛나는지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싱글거리며 웃고 밝게 인사하던 Y지만, 양궁 이야기를 할 때의 Y는 평상시의 Y와는 조금 달랐다. 좋아하는구나. 아무리 땀을 안 흘린다고 말하지만, 모든 종목이 기초 체력 훈련부터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 의주도 알았다. 그런 걸 다 하고도 여전히 신나는구나.“다음에 놀러 오면 가르쳐줄게.”
“네?”
“원래 안 되는데. 도서관에만 앉아있으면 안 돼. 밥도 좀 잘 먹고.”
“…”
“그래야 엉아처럼 몸도, 어? 키는 크지만. 너도 백팔십 넘지?”아직 하복을 입을 때가 아니라 춘추복만 입고 있었더니 그 밑에 한동안 검을 휘두르느라 단련한 팔은 못 본 모양이다. 의주는 그저 허허하고 웃어넘겼다.그런데 Y는 그 후부터 의주를 볼 때마다 훈련 전에 놀러 와라, 점심시간에 체육관에 가자, 훈련실 보고 싶지 않느냐 말을 걸었다. 의주는 솔직히 다시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그리 있지 않아서 이리저리 뺐는데 그러면 Y가 아, 의주가 나 미워해, 하면서 입술을 쭉 내밀었다. 부장 형은 이 새끼 어디서 도서부 인력을 빼갈라고 그러냐고 화를 냈지만 Y는 굴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Y는 우연히 의주의 팔을 텁 잡았다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쭈물거리더니 ‘변의주 샌님인 줄 알았는데 뭐 쫌 있는데? 헬스 다녀?’ 하고는 그대로 팔을 끌어 양궁부 훈련실로 갔다. 훈련실에 가자 땀냄새가 훅 끼친다. 냄새가 기억에 제일 오래 남는다고, 운동하는 사람의 냄새가 나자 의주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안 잡아먹어, 한 번만 해봐.” 문가에 가만히 서 있는 의주를 보고 Y는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형은 제가 왜 해봤으면 좋겠는데요?”
“재밌으니까. 너도 해봤으면 해.”
“…”
“진짠데.”
“…”
“양궁부 오라는 거 아냐. 양궁으로만 우리 학교 오는 애들도 있고 1학년들도 엄청 많이 지원해서 사람 부족한 것도 아니고. 여름이면 반은 포기하지만…”
“…”
“도서관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스트레스 풀 구석은 하나 있어야지.”의주는 마지못해 부실 안으로 들어서서 Y가 건네는 활을 잡았다. Y는 신나게 웃다가도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자, 여기로 와. 어깨너비만큼 벌려 서고. 과녁이랑 90도가 되게. 그리고 노킹. 화살 이렇게 끼우고. 이 중심을 이렇게 잡아. 너무 꽉 잡지 말고, 그렇지. 여기 엄지. 그리고 새끼손가락 빼고 이 세 개로 붙잡고. 쭈욱 올리고. 어깨 수평. 팔꿈치 펴지 말고. 한 쪽 팔에 힘 너무 들어가지 않게. 그렇지. 쭈욱 당겨 쭉. 목까지. 쭉쭉. 어어. 턱에 붙이고 한쪽 눈만 떠서 점 맞추고. 조준됐으면 유지하면서 릴리즈. 활 아직 내리지 말고, 끝까지 보고, 팔로 스루.“… 저기 쏘면 0점인거죠?”의주가 얼떨떨하게 서 있으니 Y가 싱글싱글 웃는다."처음엔 와서 활도 못 당기는 애들도 많아. 아예 과녁판까지 못 가고 죽는 경우도 많고.”
“…”
“말하면 바로바로 알아듣고. 자세 척척 잡고.”
“…”
“잘하네. 소질 있는데?”한 번 더 해볼래? 하고 화살을 내미는 Y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의주는 아까 겨우 따라했던 걸 복기하며 다시 해본다. 서 있는 자세와 잡은 손을 Y가 조금씩 교정해주어 다시 자세를 잡고, 초점을 맞춰 과녁을 조준하고, 마음을 침착하게 먹고. 저 가운데를 쏜다는 느낌으로. 준비하시고, 쏘세요.“…”
“…”
“이게 두번짼데 텐을 쏘네.”
“…”
“양궁 해보고 안해본 척 거짓말 하는 건 아니지?”의주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양궁은 진짜 처음이에요… Y가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아직 두 번 밖에 못봤고 여긴 실내긴 하지만… 너 진짜 잘 할 수 있을지도 몰라.“에이, 그래도…”
“그래도 생각해봐.”
“…”
“나 이런 말 아무한테나 안 해.”

그날 이후로 Y는 따로 의주에게 양궁부에 들어오라는 설득을 하지는 않았다. 훈련실에 들어갈 때 빳빳하게 굳어있던 것 때문에 그랬는지. 그런데 의주는 가끔 그 감각이 생각났다. 조준을 해서 맞춘 점에 튕겨나간 화살이 정말로 꽂히게 되었던, 그 활을 놓을 때의 손의 감각, 눈으로 확인할 때의 짜릿함.의주는 운동이 싫어진 건 아니었다.
어쩌면 혼자하는 건 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언가가 제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손에서 떠나보내는 거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그래서 Y에게 물었다. 혹시 신입부원은 언제 받느냐고. 그랬더니 Y는 웃으며 말했다. 두번만에 텐을 쏘는 애가 있었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데려와보라고 했다고. 너만 괜찮으면 이따 가보자.

오전부터 협회에서 마련한 행사에 다녀와, 오후에 겨우 선수촌에 도착했다. 하루만 더 있으면 출국이었다. 아침 행사에 다녀오고 나서는 내리 누워있다가 몸이 좀 찌뿌둥하다 싶을 때 쯤 밖에 나가 선수촌 주변을 조금 뛰었다. 가볍게 열이 오를만큼 러닝을 돌고 온 뒤, 이온음료 하나를 손에 들고 벤치 그늘에 앉고 나니 심심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어 핸드폰도 못 봤다. 문득 궁금해졌다. 니콜라스는 어떻게 됐지? 바로 오늘 경기 결과를 검색해본다.

조금 놀라 중계 다시보기 클립을 틀자 땀에 젖어 숨을 고르고 있는 니콜라스가 있다. 랠리가 길게 이어지다가 니콜라스가 보낸 클리어가 아웃으로 판정되자 대만에서 작전 타임을 요청했다. 때마침 캐스터와 해설이 상황을 읊어준다.대만의 왕이샹이 2세트를 먼저 따내고 펜탈라가 3세트를 가져간 상황에서 시작한 4세트였죠.
네, 펜탈라가 경기 초반부터 서브 범실을 하고 덕분에 왕이샹 선수가 점수를 많이 땄는데 펜탈라 선수가 바로 뒤쫓아왔습니다.
펜탈라 선수가 비록 랭킹은 훨씬 하위권에 있지만, 그건 국제대회 경험이 많이 없는 신인이기 때문이라고 하죠?
또 배드민턴은 기세를 많이 타는 스포츠이기 때문에요, 한번 흐름을 타면 또 마지막까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는 게 배드민턴의 묘미거든요.
그럼 랭킹이 차이가 많이 나도 승패를 확언하기 어렵다는 건가요?
네, 지금 보시듯이 대만의 왕이샹 선수는 지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금메달로 현재는 세계 랭킹 1위지만요, 세계 랭킹 70위권인 펜탈라 선수에게 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듀스 상황까지 온 거군요. 말씀드리는 순간 경기 다시 시작됩니다.랠리가 짧게 이어지다 니콜라스가 네트 가까이 던진 드라이브를 재빠르게 받은 인도 선수가 헤어핀으로 네트를 아슬하게 넘겨 셔틀콕을 꽂아넣었다. 미처 받지 못한 니콜라스가 당황하는 동안 네트 반대편에선 환호가 터져나온다.니콜라스 선수, 평상시에는 경기 운용을 아주 빠르고 깔끔하게 보여주는 편인데요. 지금 많이 긴장을 한 것 같습니다.거기까지만 보고 의주는 동영상을 껐다.운동선수가 늘 잘할 수는 없다. 하물며 매번 승리할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다. 어떤 홈런 타자도 모든 공을 받아칠 수는 없고, 어떤 황금발의 사나이도 매번 골을 넣을 수는 없듯이. 의주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다른 어떤 외부 요인도 없는 것 같은데 몸이 축축 늘어지거나 유난히 영점 안 맞는 날도 있었다.그걸 잘 아는 의주라도, 그리고 오히려 당사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덤덤할 수는 있어도,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패배를 직면하고 좌절하는 걸 보는 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인의 실패는 그렇게 좌절스럽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을 보는게 더 힘들기도 했다.의주가 개인전 메달 없이 돌아왔어도 덤덤했던 건, 단체전에서 금을 따서기도 했지만, 솔직히 의주의 꿈이 금메달이었던 건 아니었던 탓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프로 선수를 하고 싶은지도 확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펜싱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욕심은 그닥 없었고, 솔직히 그런 책임을 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의주는 양궁을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같은 양궁부에 있는 부원들도 대체로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활을 잡았다. 대회에 나가서 만나는 또래의 고등학생들도 아예 양궁으로 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한 케이스가 많았다. 의주는 그 몇 년이 부족한 만큼 더 많은 시간으로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해 기본기를 채우기 위해 꼭 남아 훈련을 했다. 훈련량이 버거우면 그만큼 근력과 유연성 훈련을 하고 운동장을 돌았다. 코치는 의주가 워낙 타고난 센스가 좋고, 마인드컨트롤이 잘 되어서 정말 빨리 따라잡는다고 했다.코치는 의주가 마인드컨트롤이 잘된다고 했지만 의주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마음에 그늘이 지고 울렁일 때, 그래서 가만히 땅 위에 서 있어도 뱃멀미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그 때 과녁을 보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이 잔잔한 호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의주는 양궁이 좋아졌다. 성난 파도를 잦아들게 하는 법은 자연에도 없는데, 어쨌든 자기 마음의 파도를 잠재울 방법은 찾아낸 거니까.그래서 의주는 Y를 동경하게 되었다. 굳어있던 제 손에 활과 화살을 쥐어준 것도, 계속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준 것도 너무 고마웠다. 제가 양궁부에 들어온 이후로 도서관도 안 가고 부실에서 저의 자세를 봐주는 Y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그해 의주는 Y의 앙다문 입술과 높은 코에 활이 와서 바짝 붙는 걸 넋 놓고 보느라 여름을 다 보냈다. 땡볕에서 어깨가 시리게 하루 종일 활을 당기는 전지훈련도 좋았다. 붙어있는데 내내 재밌게 해주는 형이. 그때쯤 의주는 마음에 드리운 폭풍우를 잠재운 건 양궁이 아니라 양궁을 알려준 Y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그런 Y의 꿈이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나중에 양궁부에 들어와서야 알았지만 Y는 학교에서 제일 잘했고 중학교 때는 소년체전에서 신기록도 세웠다고 한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체육을 하셨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트레이닝 받은 엘리트. 1학년 가을쯤 의주는 Y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저야 아무리 잘해도 대학 진학에나 써먹겠지만 Y는 정말로 금메달을 딸 수 있을 거라고. 국가대표만 된다면, 그 이후부터는 Y에겐 순조로운 길일 거라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안 그러던 애가.”플라스틱 컵 바깥에 물방울이 잔뜩 맺힐 정도로 멍하니 앉아있던 의주 옆에 진선이 와 앉았다. 뭐하냐? 내일 비행기 9시로 미뤄졌대. 밥 먹고 출발한다는 듯. 짐은 안 챙겼어? 이런저런 소리를 해도 그냥 어어 하고 답하고 만다.“왜 애가 정신을 빼놓고 있어.”
“걍 잠깐 딴생각.”
“그래라. 대회 때 안 그래서 다행이네.”의주가 핸드폰 화면을 켜자, 니콜라스의 중계를 보던 게 그대로 있다.“어우, 안 그래도 나도 봤어. 속상하겠더라.”
“그니까… 괜히 나도 속상한 것 같고.”
“원래 다들 그러잖냐. 한 번씩 미끄러지고.”
“그렇긴 하지…”의주가 괜히 풀이 죽어 대답했다.“아, 근데 너 어제 니콜라스랑 연락했다며?”
“…그런 말도 해?”
“어. 자기 피드 염탐했다고 하던데.”
“염탐이라니이.”
“막 3년 전 거에 좋아요 눌렀다고.”
“그게 왜.”
“솔직히 누가 나한테 그랬음 오해했어.”
“그게 왜?”
“완전 플러팅이지!”그게 무슨 소린데 진선아 제발… 의주가 안 그래도 심란한데 더 심란해졌다.“근데 그래 놓고는 너무 자기랑 대화 안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얘기하길래 그냥 뒀다고… 아니 근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말하나?”
“…그러긴 했지?”
“너 니콜라스랑 친해지고 싶어?”
“…”
“솔직히 좀 멋지다고 생각했지.”
“그건 당연히…”
“그럼 친해지자.”아, 이런. 얘 ENFP였지. 의주는 고맙긴 한데 갑자기 피곤해질 것 같아 하아아 한숨을 내뱉고 마른세수를 한다. 진선은 옆에서 우리 내일 출국하는데 그전에 만나야지, 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어 니콜 난데. 지금 숙소야? 나올 수 있어? 잠깐 보자.“아니, 왜 불러 부담스러우시잖아…”
“야, 괜찮아 괜찮아.”
“안 그래도 가뜩이나 기분 별로일 텐데…”
“그러니까 그럴 때일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서 환기를 해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의주의 논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보통 그냥 집에 들어가서 혼자 있고 싶지 않나? 좀 자다 일어나면 또 뛰러 나가고… 옆에서 듣던 진선이 나온다고 했잖아 조용히 해 하고 일축했다.시간이 조금 지나자 니콜라스가 저 멀리서 걸어왔다. 일어나서 맞이하는 진선 뒤로 손을 붕방붕방 흔들며 다가오는 니콜라스가 보였다. 졌는데도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의주는 그렇게 오는 니콜라스를 보고 웃었다.“왜 불렀어.”
“너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운동하라고.”
“장난해? 오늘 많이 했어.”
“또 해.”
“너나… 어, 의주.”니콜라스가 뒤에 앉아있던 의주를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핫… 안녕하세요. 머쓱하게 일어나서 악수를 청하는 의주를 보고 옆에 있던 진선이 웃었다. 얘 왜 이렇게 뚝딱대.“사실 의주가 너한테 반했대.” 진선의 말에 의주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아 아니… 저는 그냥 경기 잘 봤다고…”니콜라스는 그냥 그러고 있는 둘 보며 웃기만 했다.“저 오늘 되게 못했는데 잘 보셨구나.”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너무 잘…”
“거짓말 안 해도 돼요.”그러고는 갑자기 자조한다. 하, 오늘 좀 바보 같아서… 한심했어요. 의주는 쩔쩔매며 아니 오늘도 너무 잘했어요 하고 갑자기 칭찬을 쏟고.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진선이 웃는다. 빨리 둘이 인스타 맞팔해. 카톡도 교환하고. 배지 안 가지고 왔어? 배지라도 교환해. 무슨 사회자처럼 뻘쭘하게 서 있는 둘을 데리고 막 진행을 시키는 바람에 건장한 남자 둘이 아이폰을 들고 나란히 서서 서로의 번호를 입력한다. 슬쩍 옆모습을 보자 니콜라스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입술을 옹 하고 다문 고양이 같은 표정.“근데 진짜 솔직하게.”
니콜라스가 머뭇거리며 묻는다.
“저 오늘 진짜 별로지 않았어요?”왜 이런 걸 묻지. 의주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오늘도 잘했어요. 근데 어떻게 매번 완벽해요? 그건 사람도 아니고 스포츠도 아니에요. 한국에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 있어요. 알아요?“들어봤어요.”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라고 그랬어요.”회전근개에 계속 문제가 생겨 재활을 병행하느라 부진했던 Y가 좌절하자, 코치가 Y에게 하던 말이다. 의주도 그걸 옆에서 다 듣고 있었다. 그게 그때의 Y에게는 별로 위로가 안 되었는지, 의주가 2학년이고 Y가 3학년이던 해, 전국체전 지역 대표 선발에서 의주가 Y를 제치고 선발됐을 때부터 Y는 의주를 보지 않았다. 인사는 받아줬지만 전처럼 의주를 살뜰히 챙기고, 의지할 구석이 되어주던 Y가 아니었다. 전국체전을 마치고 지역 신문에 의주의 이름이 실리게 된 그 가을, Y는 더 이상 양궁부실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의주는 그 말을 하면서도 걱정했다. 그게 니콜라스에게 위로로 가서 닿지 않을까 봐.그래도 그 말을 들은 니콜라스는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잠시 말이 없던 니콜라스는 갑자기 의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근데 저랑 진짜 친해지고 싶어요? 왜요?”그러게, 왜지? 잘해서? 진천에는 널린 게 금메달리스트다. 정말, 매일 보는 게 투지에 불타는 사람들이다. 의주는 다른 경기를 딱히 챙겨보는 타입도 아니다. 근데 유독 니콜라스가 눈길을 끈 이유는 뭘까.의주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니콜라스는 별로 친해지기 싫어요? 하고 물었다. 그건 아니니 고개를 도리도리. 사실 니콜라스는 척 보기에도 저와 너무 다른 타입의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확신을 가지고 한 길만 걸어온 타입이고, 자신도 넘치고, 쇼맨십도 있고. 의주는 팀의 형들과 함께 했던 금메달 세레모니도 쑥스러워했었다. 그렇게 어제오늘 영상을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는지부터, 마인드 컨트롤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징크스는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극복하는지, 두려움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까지도 궁금해진다고.그래서 겨우겨우 입을 뗐다. 사실 의주도 확실하지 않지만.“음… 니콜라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그 얘기를 들은 니콜라스의 눈이 땡그래졌다가 곧 귀가 붉어진다. 옆에서 듣던 진선은 어이구야. 하고 탄식을 뱉었다. 그런 말을 해놓고 혼자 너무 멀쩡한 의주 때문에 니콜라스와 진선이 눈빛을 교환했다.“야 잠만, 의주야 나 전화 온다. 둘이 얘기 좀 하고 있어봐.”
진선이 핸드폰을 쥐고 갑자기 저 멀리 건물 안으로 뛰어간다.“무슨…”졸지에 그늘 벤치에는 의주와 니콜라스, 둘만 남겨졌다. 의주는 안 그래도 뻘쭘한데 더 어색해져서 올려놓은 입꼬리 끝이 달달 떨리는 것 같았다.“그, 저…”
“네.”
“저, 이번에 아시안게임 끝나고 한국 가요.”
“대회가 있어요?”
“아뇨, 그냥 쉬러. 다음 대회는 겨울이에요.”
“아. 한국 진짜 좋아한다는 거 봤어요.”
“그것도 찾아봤어요?”
“아…”의주는 굳었다가, 니콜라스가 저를 보고 생글생글 웃는 걸 보고 같이 웃었다. 어제나 아까 지었던 사회생활용 미소 말고 진짜 웃음.“네, 궁금했다니까요.”
“아하. 저도 사실 의주 찾아봤는데.”
“우와… 저 뭐 안 뜰 텐데.”
“뉴스에서 훈남 궁? 군사?”
“궁사… 활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맞아, 훈남 궁사.”
“아…”의주는 굳이 보도를 찾아보진 않았지만 누나가 가족 단톡방에 ‘ㅋㅋㅋㅋㅋㅋㅋㅋ’ 메시지와 함께 보낸 그 기사의 제목은 봤다. 훈남 궁사… 그게 거기까지 갔구나… 부끄럽다 생각했다.“저도 의주 궁금해요.”
“…아.”
“저랑 되게 다른 사람 같아요.”
“그, 그렇죠?”
“저 한국 가면 놀아주세요.”
“네?”
“싫어요? 바빠요? 대회 있어요?”
“아, 아뇨? 저도 휴가예요.”
“그럼 놀아줘요. 한국에 친구 없어요.”인스타 보니까 많은 것 같던데. 이런 말은 속으로 꾹 삼켰다. 의주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으니까. 니콜라스가 웃으며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뜯어본다.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해 괜히 피하니 오히려 더 집요하게 쳐다봐 와서 의주는 손을 꼼지락거렸다.“그럼 반말하자. 의주라고 불러도 돼?”
“응.”
“오늘 기분 안 좋았는데, 의주가 나 궁금하다고 해서 기분 좋아졌어.”
“그럼… 다행이다.”
“나 원래 훨씬 더 잘하는데.”
“알아!… 오늘도 잘했어.”니콜라스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다. 한국어 원어민은 나인데 할 말을 잃고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매는 게 나 같고, 그걸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는 건 니콜라스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제가 왜 이렇게까지 떠는지는 저도 모를 일이었다.왠지 여유로워 보이고, 살짝 애교 있는 말투는 정말 누군가를 생각나게도 했지만.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 앞에서 의주가 떠는 것도 맞긴 했다.“의주.”
“응.”
“한국에서 봐. 연락할게.”
“그래.”
“나 들어가볼게. 진선한테 나 먼저 간다고 전해줘.”그러더니 니콜라스는 벌떡 일어나서 안녕, 하고 갔다. 니콜라스가 멀어지자 진선이 그제야 나타났다. 어휴, 미안.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의주는 진선을 타박하거나 몰아세우진 않았다. 덥다, 들어가자, 했을 뿐.

의주는 니콜라스가 한국에 올 때쯤에나 밥 한번 먹자고 연락할 줄 알았는데, 의주가 미처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연락했다. 한국 입국 일정은 언제냐, 들어가고 인터뷰 도느라 바쁘진 않냐, 한국 인터넷 뉴스에서 너를 봤다, 너 대만에도 아시안게임의 귀여운 스타 중 한 명으로 소개되었다, 의주는 유퀴즈 안 나오냐 등등. 의주는 제게 벽을 친다고 오해했던 니콜라스를 생각해 성실하게 답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데 벽을 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어서 얘랑 이러고 있는데? 얘는 왜 송진선도 아닌 나에게 맨날 연락하고 자기 사진을 보내는데? 왜 타자 치기 귀찮다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밤에 음성메시지를 보내면서 잘 자라는 말을 하는데?의주의 주특기는 생각 비우기였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장소를 옮기거나 한번 자고 일어나면 깨끗하게 재정비가 되는 편이었다. 지금의 문제는 니콜라스의 생각이 너무 자주도 난다는 거였다. 빨리 차는 쓰레기통을 계속 비우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니콜라스의 생각을 하지 말까 싶으면 더 생각이 났고 생각하지 않으려 답장을 안 하고 있으면 “의주 금메달리스트 되어서 동메달인 나랑은 안 놀아줘” 하고 연락을 남겨왔다. 그걸 어떻게 무시하겠어. 의주는 일주일쯤 지내고 나서는 차라리 지금이 시즌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언론 인터뷰와 협회 일정을 다 소화하고 진짜 개인 자유 시간이 주어지게 되었을 때쯤에 니콜라스도 한국에 들어왔다. 니콜라스는 한국에서 한 달여간 쉬었다가 대만에 돌아갈 거라 했다. 어느 날은 대뜸 의주는 한국에서 어딨어? 하고 묻더니 본가 위치를 알아갔다. 의주도 잠깐 휴가를 받았지만, 회장배며 아시안선수권 등 대회가 없는 것도 아닌 데다 또 내년 국대 선발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루틴을 해야 해서 진천과 본가를 왔다 갔다 한다고 답했었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동네에서 지하철로 한 번에 닿는 서울의 가까운 동네로 숙소를 정했다. 근데 여기 다른 데 가긴 불편할 수도 있어. 라고 하니까 니콜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 친구 별로 없고 의주랑 놀 거라서 괜찮아, 라고 답했다.그래서 의주는 니콜라스가 처음 들어오고 내내 진천 마포 일산을 왔다 갔다 했다. 오자마자 보자고 해서 봤더니 갑자기 막 대만 과자를 내놨다.“의주 이거 먹어봐.”
“이게 뭔데?”
“에그롤. 해변주주.”포장을 까고 있던 의주와 에그롤을 번갈아 보던 니콜라스가 갑자기 “주주? 의주. 주주.” 하고는 그 이후로 쭉 의주를 주주라고 불렀다. 제멋대로 붙인 애칭이었다. 먼저 니콜라스를 궁금해 한 쪽은 의주였지만 하루 종일 의주 생각만 하는 것 같은 쪽은 니콜라스였다. 기껏 만나자고 해서 나가서 밥이나 같이 먹으려 해도, 입도 짧아서 먹고 싶다는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르긴 계속 불렀다. 할 거 없어. 나 영화 혼자 보기 싫어. 주주 나 심심해. 부르라는 대로 일단 가긴 가는 변의주도 문제였지만.니콜라스는 입이 짧은 데다가 관리를 엄청 하는 바람에 단 걸 좋아하면서도 먹질 않고 버텼다. 해변주주도 잔뜩 사 와서 제발 너도 먹으라고 했더니 입을 꾹 닫고 이거 시작하면 끝도 없어, 했다. 그러고 지나가다가 빙수 보면 침을 꾹 삼키고 그랬다. 니코올 먹고 싶으면 그냥 먹어 그리고 삼십 분 더 뛰면 되잖아, 하면 버럭 짜증냈다. 의주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면 이제는 먹으라고 막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정보를 머리에 입력했다. 사진 더럽게 못찍었었는데 니콜라스가 원하는 대로 사진 찍는 법도 이젠 좀 익숙해진 것 같았다. 붙어 다닌 지 한 일주일 지나니 이젠 “여기 좀 멋진데” 하면 알아서 “저기 서 봐봐” 하고 전신샷, 흉상, 엠지샷까지 잘만 찍어줬다. 그러면 니콜라스 얼굴에 미소가 헤실헤실 걸렸다.오늘은 멀리 성수동까지 나갔다. 여기 나 한 번도 못 와봤는데! 신나하는 니콜라스를 데리고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택시에서 니콜라스는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며 의주 이제 진짜 사진 잘 찍네, 하고 잘했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였다. 니콜라스의 그 말에 의주가 어디선가 들어 배운 적 있던 쩐더마? 라고 답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확인하다가 고개를 팩 들고 돌아봤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쩐더마?”이번에는 핸드폰 화면까지 끄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숙였다.“나 발음 잘못했어?”
“아니, 주주…”의주는 중국어를 하나도 못 했다. 안 그래도 니콜라스가 아는 거 있냐고 물어봤을 때 니하오 쎼쎼 워씽씨라고 하니까 니콜라스는 그냥 웃고 말았었다. 그런데 이건 반칙이지.“왜, 왜 그러는데.”
“…”
“나 뭐 잘못했어?”파묻었던 고개를 든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온통 빨갰다. 왜 그래? 니콜. 내가 미안해. 응? 미안해는 중국어로 뭐지? 파파고 찾아봐야지. 성우의 목소리로 핸드폰에서 소리가 나온다. 對不起. 의주가 따라 한다. 뚜에부치. 이거 맞아? 니코올, 뚜에부치. 팩 돌아보는 니콜라스의 얼굴은 거의 울 듯한 표현이다.“너 진짜 짜증 나.”그러고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의주는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당황해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을 하고 있는데, 그새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니콜라스는 문을 열고 팩 일어나서 가버린다. 의주는 뒤따라 나서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니콜라스를 쫓았다.이게 뭐지.의주는 이럴 때 가끔 피로감을 느끼긴 했다. 니콜라스가 싫은 건 아니고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피로감. 그게 싫진 않았다. 니콜라스가 처음 궁금해지고 했던 건 전부 다 니콜라스가 저와 너무 다른 사람이어서였으니까.니콜라스는 말도 없이 휘적휘적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니콜, 얘기 좀 해줘. 응? 나 말 안 하면 몰라.안절부절못하던 의주는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다. 항시 표정 관리도, 마인드컨트롤도 잘 해 진천에서 별명이 생불이었던 의주였는데. 이렇게까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그걸 숨기지 못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기도 했다.층수가 올라가는 내내 니콜라스는 예전에 본 적 있던, 그 입을 꾹 닫은 표정을 했다. 저 표정이 무슨 의미였더라. 의주가 한창 해석하려는 와중에 니콜라스가 내렸다. 의주는 같이 내려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니콜라스가 한숨을 한번 푹 쉬더니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말했다.“의주도 내려.”의주의 휴가 기간이기도 했던 니콜라스의 이번 한국 일정 내내, 니콜라스와 만나고, 가끔은 이 호텔까지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기도 했지만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의주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의주.”
“니콜, 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으면 말을 해줘.”의주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왔다고 올린 인스타그램 피드에, 친구로 추정되는 온갖 한국인들이, 심지어는 진선도, 대체 한국에 왔는데 왜 연락을 안 하냐, 만나자고 댓글을 그렇게 달아도 sorry too busy 한 마디로 일축하면서 매번 의주를 부르는 이유를. 그러면서 갑자기 기분이 왔다갔다하고.“의주는… 하.”
“…”
“의주 진짜 왜 양궁 금메달 땄는지 알 것 같아.”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딱 와서 꽂는 말만 해?”
“그게 무슨 소리야.”니콜라스는 이미 목까지 빨갛다. 다시 한번 짜증 난 표정으로 머리를 쥐뜯더니 의주의 눈도 못 마주치고 말한다. 의주는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의주를 보고 끄아악 하는 소리를 낸 니콜라스가 갑자기 와다다 쏘아붙인다.너는 왜 자꾸 오해하게 해? 내 피드 보면서 좋아요 계속 누르다가, 궁금하다고 했다가, 근데 또 물어보면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얘기하고, 나 한국 온다고 하니까 보러오고, 보러 오라고 할 때마다 오고, 밥 먹기 싫다고 그러면 샐러드 사다 주고 그래?
의주.
너는 왜 내가 힘든 거 다 알아?
너는 나한테 힘든 거 말 안 하잖아
왜 너만 알아?하루는 니콜라스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은사님을 만나러 간다 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 힘든 곳으로 이사를 가셨다 하여 데려다준다고 자차를 끌고 갔다. 와서 한 게임 치라는 걸 인사만 드리고 벤치에 앉아있었다. 의주는 아직 제게 날아오는 무언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니콜라스는 딱히 은사님과 훈련을 하거나 하지도 않았고 그냥 한쪽 구석에서 대화만 많이 했다. 이야기를 다 하고 돌아온 니콜라스는 눈이 빨개져 있었다. 의주는 부러 아무말도 않고 돌아가는 길에 우리 여기까지 왔는데 드라이브나 할까? 하고 일부러 돌아가는 코스를 택했다. 피곤하면 좀 자, 하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 그리고 호텔에 도착해서는 안전벨트까지 다 멘 운전석에서 니콜라스에게 손 인사를 했다.“너 나 놀려?”
“…”
“재밌어?”
“니콜, 아니야아.”
“또 이렇게 애교 부리잖아.”
“아니 이게 무슨 애교…”
“하…”의주가 나 꼬셨는데 나만 의주 좋아하잖아.니콜라스가 그 말을 하더니 침대 위로 팩 엎드려버렸다. 의주는 어쩔 줄을 모르고 다가갔다. 니콜라스, 니콜, 저기…“내 말도 들어봐.”
“…”
“나는…”
“…”
“아니, 너는.”
“내가 뭐.”
“너는 세계 최고의 선수인데, 나는 진짜… 나 혼자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
“내년에도 국대 할 수 있는지도 몰라. 못 뽑혀도 계속 훈련하고… 시즌 중에는 바쁘고 또 막 예민해지기도 해.”
“…”
“근데 너 갖고 논 건, 진짜 아냐 니콜…”
“…”
“그리고 나 힘든 거 얘기 안 한 건… 너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니까.”
“야.”
“물어보지 않은 것도 그래서고.”
“넌 진짜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바보다.”
“너도 바보야.”
“왜.”
“…그냥.”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샜다. 여태 화나서 잔뜩 올라갔던 눈썹이 스륵 내려온다. 니콜라스가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자 의주도 그 옆에 앉았다.“너 두 번째 만났던 날, 진선이가 말했던 거 기억나?”
“뭐지?”
“의주가 너한테 반했대, 이거…”
“아.”
“그땐 몰랐는데, 그랬던 것 같아.”
“근데 그날 나 최악이었는데.”
“니콜, 그게 무슨 상관이야.”
“…”
“너 나 봤잖아. 나 배드민턴 아예 못 쳐. 앞으로도 못 칠 거야.”
“…”
“난 내 얼굴로 뭐가 날라오면 그대로 굳어버리거든.”이 말을 하다가, 의주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 양궁 시작하고 이 트라우마를 누구한테 소리 내서 얘기한 적이 처음이구나, 라고. 이상하게 의주는 니콜라스와 있을 때면 자기 마음속 얘기까지를 다 까뒤집어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이어서 하려는 말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니콜라스가 그렇게 피곤하게 굴어도 부르면 꼬박꼬박 나가는 이유. 잘 찍지도 못하는 사진 어떻게 찍어야하는지 유튜브 영상을 두 시간 씩 보면서 니콜라스를 찍어주는 이유. 자유로가 얼마나 막히든 니콜라스가 부르면 차를 끌고 나가는 이유. 그게 다 무엇이겠어.“…”
“내 말은, 그런 거랑 상관없이… 너만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나도 너 좋아해, 니콜라스.의주의 손이 니콜라스의 손 위에 얹어진다. 새삼 그 손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땀에 축축이 젖어있어 니콜라스는 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뭐야, 왜 이래. 긴장했어?”
“응, 나 엄청 떨려.”
“아닌 것 같은데.”
“직업병이야.”
“직업병?”
“그런 게 있어.”니콜라스가 실없이 웃고 있는 걸 의주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마저 웃었다. 한참을 이유 없이 웃다 공중에서 둘의 눈이 맞닿았다. 시선이 닿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감기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의주가 손으로 니콜라스의 턱과 목을 감싸고, 니콜라스가 먼저 아랫입술을 물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듯이.

의주는 2차 선발전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서, 일정이 딱히 없는 12월에 크리스마스를 끼워서 일주일 정도 시간을 냈다. 원래 휴가 때도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싫어 여행도 잘 가지 않고 루틴을 꼬박꼬박 하는 의주지만, 이번에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크리스마스는 어떻게든 니콜라스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내가 대만에 갈까?
나 12월에 대회 있는데
어딘데? 나도 가면 되지롱패딩을 입고 덜덜 떨며 집을 나섰던 것이 무색하게, 정확히 열다섯 시간 뒤의 의주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택시를 겨우 잡아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차 문을 열어 에어컨 바람을 맞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징글벨 징글벨 징글벨 락은 여전히 위화감이 심했지만.호텔에 먼저 택시를 세운 뒤 컨시어지에 방 번호를 대고 캐리어를 맡겼다. 가벼워진 손으로 두 번째 행선지로 향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한 것 같아 의주는 초조해졌다.요금을 내고 내려서 달려간다. 입장하고 보니 경기가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았다. 의주는 얼른 자리를 찾아가서 앉아 숨을 골랐다.One - Love.경기장에 스코어 중계 소리가 크게 울린다. 코트에 있던 니콜라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의주가 있어야 할 자리 쪽을 바라본다. 오래 찾을 것도 없이 많은 사람 중에서 의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의주는 바로 거기에 있다. 니콜라스보다도 더 니콜라스를 믿는 얼굴을 하고. 의주를 처음 봤던 어떤 여름날 그때 그대로.그 얼굴을 보자 문득, 니콜라스는 앞으로 어떤 것이 날아와도 맞받아칠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니콜라스가 서브 자세를 잡았다.

X1. An unknown person
2. In archery, the innermost ring of the white center is scored as an “X.”
3. A symbol for a kiss, signifying the shape of pursed lips of the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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